제12회 태백산 눈꽃축제 참관

2012.1.29 강원도 태백시 도립공원 태백산 당골광장에서 열리고 있는 제12회 눈꽃축제를 참관해 보았습니다. 지난 해는 구제역 때문에 열리지 못하였고 올 해는 여느 때보다도 눈조각 작품수가  조금 많은 듯 하였지만 작품의 질은 다소 떨어져 실망스러운 느낌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최고기온이 0도라고 하였지만 날이 쾌청하고  바람이 없고 햇빛이 내리쬐는 바람에 추위를 느낄 수가 없었서 축제참관은  더없이 좋았고 그래서인지 태백산 등산객들과 눈축제 관람객 인파가 엄청 몰려 들었습니다. 작품전시장과  석탄박물관을 차례로 둘러보았는데 관람객들이 너무나 많아서 대충 둘러보았지만 유익한 전시물들이 눈에 띄기도 하였습니다.


by 알파이너 | 2012/01/30 08:35 | 풍경사진 | 트랙백 | 덧글(0)

강릉 선교장-오죽헌 방문



<江陵 船橋莊에 대한 정보>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에 있는 고가(古家).

지정종목  중요민속자료  
지정번호  중요민속자료 제5호  
지정일  1967년 04월 18일  
소장  이강륭  
소재지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 431  
시대  조선  
종류/분류  가옥  

  
1967년 4월 18일 중요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되었다. 이 지방 명문으로 알려진 이내번(李乃蕃)이 처음으로 살기 시작하여 대대로 후손들이 거처하는 집인데, 열화당(悅話堂)·안채·동별당(東別堂)·활래정(活來亭) 등 모두 4채가 있다. 가장 오래된 안채 주옥(住屋)은 당초에 주거를 정한 때의 건물이라고 전하나 확실하지 않다. 사랑채인 열화당은 1815년(순조 15)에 오은거사(鰲隱居士) 이후(李后)가 건립한 것이며, 활래정은 그 이듬해 세운 것을 증손인 이근우(李根宇)가 현재의 건물로 중건하였고, 동별당은 약 50년 전에 새로 건립한 건물이다. 안채는 동편에 있으며 주옥의 평면구조는 ㄱ자형으로서, 동쪽 끝이 부엌이고 건넌방은 서쪽에 있다. 안채와 행랑채 사이에는 담을 쌓아서 막았으며, 행랑채는 남쪽에 있고 서쪽으로 사랑채에 출입하는 솟을대문이 있다. 사랑채는 높은 석축 위에 서 있고 동별당은 안채의 동쪽 전면에 있는데 2층으로 된 높은 석축 위에 서 있고, 맞은편에 서별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활래정은 대문 밖인 선교장 입구에 있는 큰 연못 옆에 세워진 정자로서, 연못 속에 돌기둥을 세워 주위에 난간을 돌렸으며, 팔작지붕에 겹처마의 납도리집이다.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 431번지 있다.


<오죽헌에 대한 정보>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 양식이다.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태어난 집으로 조선 중종 때 건축되었다. 한국 주택건축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에 속한다. 4면을 굵은 댓돌로 한 층 높이고 그 위에 자연석의 초석을 배치하여 네모기둥을 세웠다.

건물을 향하여 왼쪽 2칸은 대청이며 오른쪽 1칸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대청 앞면에는 각각 띠살문의 분합()을, 옆면과 뒷면에는 2짝 씩의 판문()을 달고, 그 아래 벽면에 머름을 댔다. 온돌방은 뒤쪽 반 칸을 줄여 툇마루를 만들고, 앞벽과 뒷벽에 두짝열개의 띠살문을 단 것 이외는 모두 외짝문이다. 천장은 온돌방이 종이천장이고 대청은 연등천장으로 꾸몄다. 대들보는 앞뒤 기둥에 걸쳤으나, 온돌방과의 경계에 있는 대량()은 그 아래 중앙에 세운 기둥으로 받쳤다.

대량에서 좌우 측면의 가운데 기둥에 걸쳐서는 충량()을 배치하였으며, 그 상부에는 지붕 합각() 밑을 가리기 위하여 우물천장을 만들었다. 대량 위로 종량()과의 사이에는 대공을 받쳤는데 그 형식은 오래된 수법을 따르고 있으며, 조선 초기의 주심포()집에서 볼 수 있는 대공의 계통을 이은 것이다.

기둥머리에 배치된 공포(栱)는 주택건축에서 보기 드문 이익공형식()이며 그 세부 수법으로 보아 가장 오래된 익공집 건축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쇠서의 곡선에는 굴곡이 남아 있고, 첨차(檐)의 형태는 말기적인 주심포집과 공통되는 특징을 지녀 주심포집에서 익공집으로의 변천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구조이다. 

 




by 알파이너 | 2012/01/05 08:49 | 풍경사진 | 트랙백 | 덧글(0)

영주 부석사 탐방

2011.12.25  기차여행을  하고 싶어서  울산에서  영주로 향했습니다. 영주역은 중앙선과 경북선, 영동선이 만나는  철도JC입니다.  이곳 영주역을난생 처음으로 찾게된 것입니다.  영주에서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면서  676년(문무왕 16) 2월에 의상(義湘)이 왕명으로 창건한 뒤 화엄종(華嚴宗)의 중심 사찰로  유명한 부석사를  탐방해 보았습니다.  옛적 하계휴가 때  잠시 들렀던 곳이기도 하지만  국보와 보물등  문화재가 너무나 많은 사찰이라   꼭 한 번 다시 찾아 보려고 생각해 두었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따라 크리스마스인데다  매서운 한파가 불어닥쳐서  손님이 하나도 없다며 투덜대는 기사님이 운전하는 부석사행 버스를  탔는데 우리일행 2명이 큰 버스를 대절하여 간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버스손님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석사 입구에 이르니 그래도 연일들끼리, 가족끼리 삼삼오오 부석사를 찾아온 사람들이 제법 있더군요. 전각 하나 하나를 전부 돌아보고  마지막 버스를 타고 영주로 다시 나와서  초저녁에 영주역 근처 찜질방에 들어가서  피로를 풀며  시간을 보내고 0시2분에 영주역을 떠나 울산으로 돌아왔습니다. 심야열차에는 생각밖에 손님이 제법 있었고 전부 잠에 곯아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기차여행과  화엄종찰 부석사 탐방을 잘 마치게 되었습니다.

<부석사에 대한 정보>
경북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鳳凰山) 중턱에 있는 절.

종파  해동 화엄종  
창건시기  676년 (신라 문무왕 16)  
창건자  의상조사  
소재지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근본도량(根本道場)이다.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義湘)이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고, 화엄의 대교(大敎)를 펴던 곳으로, 창건에 얽힌 의상과 선묘(善妙) 아가씨의 애틋한 사랑의 설화는 유명하다. 1016년(고려 현종 7)에 원융국사(圓融國師)가 무량수전(無量壽殿)을 중창하였고 1376년(우왕 2)에 원응국사(圓應國師)가 다시 중수하고, 이듬해 조사당(祖師堂)을 재건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와 개연(改椽)을 거쳐 1916년에는 무량수전을 해체 수리하였다. 경내에는 무량수전(국보 18)·조사당(국보 19)·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국보 45)·조사당 벽화(국보 46)·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7) 등의 국보와 3층석탑·석조여래좌상·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의 보물, 원융국사비·불사리탑 등의 지방문화재를 비롯하여 삼성각(三聖閣)·취현암(醉玄庵)·범종루(梵鐘樓)·안양문(安養門)·응향각(凝香閣) 등 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또 신라 때부터 쌓은 것으로 믿어지는 대석단(大石壇)이 있다. 의상은 제자가 3,000명이나 있었다고 하며 그 중에서 10대덕(十大德)이라 불리는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表訓)·진정(眞定)·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은 모두 화엄을 현양(顯揚)시킨 승려들이었다. 이 밖에도 《송고승전(宋高僧傳)》에 그 이름이 보이는 범체(梵體)나 도신(道身)및 신림(神琳) 등도 의상의 훌륭한 제자였으며 의상 이후의 부석사와 관계된 고승으로는 혜철국사(惠哲國師)·무염국사(無染國師)·징효대사(澄曉大師)·원융국사·원응국사 등이 그 법통을 이었다.

<부석사 설화>
≪삼국유사≫에 이 절의 창건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당나라로 불교를 배우기 위하여 신라를 떠난 의상은 상선(商船)을 타고 등주(登州) 해안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서 어느 신도의 집에 며칠을 머무르게 되었다. 그 집의 딸 선묘(善妙)는 의상을 사모하여 결혼을 청하였으나, 의상은 오히려 선묘를 감화시켜 보리심(菩提心)을 발하게 하였다.선묘는 그때 “영원히 스님의 제자가 되어 스님의 공부와 교화와 불사(佛事)를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되어드리겠다.”는 원을 세웠다. 의상은 종남산(終南山)에 있는 지엄(智儼)을 찾아가서 화엄학을 공부하였다. 그 뒤 귀국하는 길에 의상은 다시 선묘의 집을 찾아 그 동안 베풀어준 편의에 감사를 표하고 뱃길이 바빠 곧바로 배에 올랐다.선묘는 의상에게 전하고자 준비해 두었던 법복(法服)과 집기(什器) 등을 넣은 상자를 전하기도 전에 의상이 떠나버렸으므로, 급히 상자를 가지고 선창으로 달려갔으나 배는 이미 떠나가고 있었다.선묘는 의상에게 공양하려는 지극한 정성으로 저만큼 떠나가는 배를 향해 기물상자를 던져 의상에게 전하고는, 다시 서원(誓願)을 세워 몸을 바다에 던져 의상이 탄 배를 보호하는 용이 되었다. 용으로 변한 선묘는 의상이 신라에 도착한 뒤에도 줄곧 옹호하고 다녔다. 의상이 화엄의 대교(大敎)를 펼 수 있는 땅을 찾아 봉황산에 이르렀으나 도둑의 무리 500명이 그 땅에 살고 있었다. 용은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공중에 떠서 도둑의 무리를 위협함으로써 그들을 모두 몰아내고 절을 창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의상은 용이 바위로 변하여서 절을 지을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해서 절 이름을 부석사로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 뒤에는 부석(浮石)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선묘용이 변화했던 바위라고 전한다. 창건 후 의상은 이 절에서 40일 동안의 법회를 열고 화엄의 일승십지(一乘十地)에 대하여 설법함으로써 이 땅에 화엄종을 정식으로 펼치게 되었다. 특히, 의상의 존호를 부석존자(浮石尊者)라고 칭하고 의상의 화엄종을 부석종(浮石宗)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모두 이 절과의 연관에서 생겨났다. 의상 이후의 신라 고승들 가운데 혜철(惠哲)이 이 절에서 출가하여 ≪화엄경≫을 배우고 뒤에 동리산파(桐裏山派)를 세웠고, 무염(無染) 또한 이 절에서 석징(釋澄)으로부터 ≪화엄경≫을 배웠으며, 절중(折中)도 이 절에서 장경(藏經)을 열람하여 깊은 뜻을 깨우쳤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이 절을 선달사(善達寺) 또는 흥교사(興敎寺)라고 하였는데, 선달이란 선돌의 음역으로서 부석(浮石)의 향음(鄕音)이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다. 또, 고려 정종 때의 결응(決凝)은 이 절에 머무르면서 대장경을 인사(印寫)하고, 절을 크게 중창한 뒤 1053년(문종 7)에 이 절에서 입적하였다. 1372년(공민왕 21)에는 원응국사(圓應國師)가 이 절의 주지로 임명되어 퇴락한 당우를 보수하고 많은 건물들을 다시 세웠다.그 뒤 조선시대의 역사는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1580년(선조 13)에 사명당(泗溟堂)이 중건하였으며, 1746년(영조 22)에 화재로 인하여 추승당(秋僧堂)·만월당(滿月堂)·서별실(西別室)·만세루(萬歲樓)·범종각 등이 소실된 것을 그 뒤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국보 제18호인 부석사무량수전과 국보 제19호인 부석사조사당(浮石寺祖師堂)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후기의 건물인 범종루(梵鐘樓)·원각전(圓覺殿)·안양루(安養樓)·선묘각(善妙閣)·응진전(應眞殿)·자인당(慈忍堂)·좌우요사(左右寮舍)·취현암(醉玄庵) 성보전시관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범종루와 안양루는 대표적인 누각이고, 원각전·응진전·자인당은 법당이며, 선묘각은 부석사의 창건연기와 인연이 있는 선묘의 영정을 봉안하여둔 곳이다. 범종루는 사찰의 중문(中門)에 해당하며, 본전을 향하는 입구 쪽에서는 팔작지붕을 하고 반대방향은 맞배지붕이므로 일반 사찰건축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성을 보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2층 누각으로서, 누각에는 ‘鳳凰山浮石寺(봉황산부석사)’라는 편액이 있을 뿐 범종은 없다.안양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집으로서, 누각 안에는 부석사의 현판기문을 모아두었는데, 그 안에는 사명당이 쓴 <안양루중창기>가 있다. 또, 취현암은 원래 조사당 옆에 있었던 부석사의 선원(禪院)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이전되어 현재는 주지실과 종무소(宗務所)로 사용되고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국보 제17호인 부석사 무량수전앞석등과 국보 제45호인 부석사소조여래좌상, 국보 제46호인 부석사조사당벽화, 보물 제249호인 부석사삼층석탑, 보물 제255호인 부석사당간지주, 보물 제735호인 부석사고려각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7호인 부석사원융국사비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원융국사비는 절의 동쪽 500m 지점에 위치하며 1054년에 건립한 것이다. 또, 삼층석탑은 본래 부석사의 동쪽 약사골 동방사지(東方寺址)에 있던 것을 이건한 것으로, 이건할 때 전라북도 익산의 왕궁리탑(王宮里塔)에서 출토된 사리를 탑 안에 봉안하였다. 그리고 부석사의 동쪽 언덕에는 10여 기의 부도가 안치되어 있는데, 그 중 1기는 고려 말의 부도로 보인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석룡(石龍)을 비롯하여 대석단(大石壇)·선묘정(善妙井)·녹유전(綠釉塼)·선비화(禪扉花)·석조(石槽)·맷돌 등이 있다. 석룡은 절의 창건과 관련된 것으로 현재 무량수전 밑에 묻혀 있는데, 머리 부분은 아미타불상 바로 밑에서부터 시작되며, 꼬리 부분은 석등 아래에 묻혀 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이 절을 개수할 때 이 거대한 석룡의 일부가 묻혀 있는 것이 발견되었으며, 자연적인 용의 비늘 모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선묘정은 절의 동쪽에 있는데, 가뭄이 있을 때는 기우제를 드렸다고 한다. 대석단은 신라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절의 입구에 있다. 거대한 축석(築石)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면석(面石)을 섞어 쌓은 것이 특징이다. 이 석단은 3단으로서 극락세계의 구품연화대(九品蓮花臺)를 상징한다는 설이 있으나 명확한 근거는 없다. 무량수전 앞에 안양루를 오르는 석단이 2단으로 조성되었으므로, 대석단과 합하여 상·중·하의 셋으로 보는 가람 경영방법의 하나로 볼 수도 있다. 녹유전은 가로와 세로가 14㎝의 정방형 기와로서 두께는 7㎝이며, 벽돌 표면에 0.3㎜ 정도의 녹유를 발라 광택을 내게 한 신라시대의 유품이다. 이것은 ≪아미타경≫에 극락세계의 땅이 유리로 되어 있다고 한 것에 입각하여 무량수전의 바닥에 깔았던 것이다. 선비화는 의상이 사용했던 지팡이를 꽂아 놓았더니 살아난 것이라 하는데, ≪택리지 擇里志≫에 의하면 의상이 죽을 때 “내가 여기를 떠난 뒤 이 지팡이에서 반드시 가지와 잎이 날 것이다. 이 나무가 말라죽지 않으면 내가 죽지 않으리라.”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by 알파이너 | 2011/12/29 22:54 | 여행사진 | 트랙백 | 덧글(0)

경주 양동마을 탐방

2011.11.26 경주 강동면 양동리 소재 양동마을을 탐방해 보았습니다. 경주양동마을은 마을전체가 1984.12.20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자료제189호)로 지정되었는데 전통 민속마을 중 가장 큰 규모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반촌으로 특이하게 손(孫), 이(李) 양성이 서로 협조하며 500여년의 역사를 이어온 전통문화 보존 및 볼거리,역사적인 내용 등에서 가장 가치가 있는 마을이다. 전국에 6개소의 전통민속마을이 있으나, 마을의 규모, 보존상태, 문화재의 수와 전통성,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때묻지 않은 향토성 등에서 어느 곳보다 훌륭하고 볼거리가 많아 1992년 영국의 찰스 황태자도 이 곳을 방문했다. 한국 최대 규모의 대표적 조선시대 동성취락으로 수많은 조선시대의 상류주택을 포함하여 500년이 넘는 고색창연한 54호의 고와가(古瓦家)와 이를 에워싸고 있는 고즈넉한 110여 호의 초가로 이루어져 있다. 양반가옥은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낮은 지대에는 하인들의 주택이 양반가옥을 에워싸고 있다. 경주손씨와 여강(여주)이씨의 양 가문에 의해 형성된 토성마을로 우재 손중돈 선생, 회재 이언적 선생을 비롯하여 명공(名公)과 석학을 많이 배출하였다. 마을은 경주시에서 동북방으로 20km쯤 떨어져 있으며, 마을의 뒷배경이자 주산인 설창산의 문장봉에서 산등성이가 뻗어내려 네줄기로 갈라진 등선과 골짜기가 물(勿)자형의 지세를 이루고 있다. 내곡, 물봉골, 거림 하촌의 4골짜기와 물봉 동산과 수졸당 뒷동산의 두 산등성이, 그리고 물봉골을 넘어 갈구덕으로 마을이 구성되어 있다. 아름다운 자연 환경 속에 수백년 된 기와집과 나지막한 토담으로 이어지며, 통감속편(국보 283), 무첨당(보물 411), 향단(보물, 412), 관가정(보물 442), 손소영정(보물 1216)을 비롯하여 서백당(중요민속자료 23) 등 중요민속자료 12점과, 손소선생 분재기(경북유형문화재 14) 등 도지정문화재 7점이 있다.


by 알파이너 | 2011/11/27 17:23 | 여행사진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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